모든 삶은, 작고 크다
'루시드폴'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I. 루시드폴의 세계를 찾아 나선 여정
루시드폴 8집을 시간을 들여 감상한 사람이라면, 한 아티스트의 놀랍도록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번 앨범을 위해 작업 공간을 손수 지었고,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 녹음과 믹싱까지 직접 했으며, 농사를 짓는 일상을 에세이와 사진으로 남겼다. 누군가에게는 훌쩍 지나가는 2년이라는 세월을 그는 대체 어떻게 보냈길래, 이토록 풍성하고 성실한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창작자들이 평생을 바치며 구하는 것이 자기 세계의 완성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난 2년 동안 루시드폴만의 세계를 구현하는데 그의 전부를 쏟아부은 것만 같다. 루시드폴 다운 소리란 무엇인가. 악기의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녹음을 위한 공간은? 그 규모는? 서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서정의 확대로서의 일상은 어떻게 가꿀 것인가. 채울 것인가. 비울 것인가. 그럼으로써 어떻게 다시 일상에서 노래를 길어올릴 수 있을까. 이번 앨범의 저변에는 그의 이러한 고민들이 깔려 있고, 고민한 것들을 그는 하나 하나 실행해나갔다.
용기 있는, 어찌 보면 대담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도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9평 남짓의 작은 작업 공간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가 글에 썼듯이 이 ‘노래하는 집’은 이번 앨범의 모든 창작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녹음과 믹싱을 했다. 악기의 울림과 귤밭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담기 위해서, 기타를 만들 때 쓰는 음향목으로 오두막을 지었다.
그렇게 마련한 공간에서, 루시드폴은 음악 인생에서 처음으로 녹음에서부터 믹싱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해 보았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와 기타 소리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더디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사운드와 엔지니어링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꼭 담고 싶었던 베이스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스티브 스왈로우의 베이스 톤을 연구했고, 결국 스티브 스왈로우가 초기에 쓰던 68년형 깁슨 베이스를 구했다. 건조하지만 감칠맛 나고 따뜻한 톤의 드럼 사운드를 위해, 2년 가까이 유튜브를 헤매고 지인들을 조르던 그는 그렇게 그가 원하던 70년대 야마하 드럼 셋을 찾아내 녹음을 할 수 있었다. 상태가 좋은 펜더 로즈 사운드를 담고자 뉴욕에서 로즈를 공수해 오기도 했고 낡은 필름 카메라와 슈퍼 8mm 무비 카메라로 지난 2년의 일상을 남겼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사랑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 모든 흔적을 오롯이 이 앨범에 남긴 것이다.
그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고로움과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굳이 위의 모든 것들을 스스로 해본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가장 루시드폴 다운 것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타고난 독학자. 그는 배우고 헤매는 과정 자체를 기꺼이 즐기는 사람임이 확실하다. 실수와 실패가 있을지라도, 더딜지라도, 그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이렇게 8집을 완성해 세상에 내보였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8집에 수록된 곡 하나하나에 무엇이 담기고 달라졌는지 감상해 보자.
II. 트랙 소개
1. 안녕,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Electric Guitar and Acoustic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이진아Jinah Lee
Electric Guitar 이상순Sangsoon Lee
Keyboards 조윤성Yoonseung Cho
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안녕, 그동안 잘 지냈나요."
팬들에게 2년 사이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 노래가 루시드폴의 8집을 연다. 친구 이상순의 일렉 기타 연주와, 이진아의 피아노 연주가 그의 노래에 우정 어린 하모니를 이룬다. 60년대의 세미 할로우 베이스, 70 년대의 드럼, 80 년대의 업라이트 피아노 소리가 2017년 그의 목소리와 합쳐져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사운드가 탄생했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인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그와 그의 아내가 2년간 필름 무비로 남긴 영상을 모은 것이다.
2. 은하철도의 밤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Acoustic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Contra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창문 너머 플랫폼 가득 찬 보고 싶던 얼굴들. 사람들은 부둥켜안고서 하나둘 날아가네."
일본의 농부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읽고서 쓰게 된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노래라는 열차에 몸을 싣고 환상 여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특정 장르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게 이 곡 만의 매력인데, 여러 장르가 뒤섞인 듯한 무국적 혹은 다국적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곡 역시, 악기 소리에 과장된 데코레이션을 빼고, 투박하고 거친 날 것 그대로의 사운드를 담아내고자 애썼다. 연주 단계에서 이미 곡이 완성됐다는 느낌을 줬을 정도로,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온 루시드폴 퀸텟의 조윤성, 황호규, 신동진과의 케미가 빛을 발한 곡이기도 하다.
3. 폭풍의 언덕
Lyrics, Composition 루시드폴Lucid Fall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Simon Pétren
Guitar and MIDI Sequencing 루시드폴Lucid Fall
Rhodes and Keyboards 조윤성Yoonseung Cho
Keyboards and MIDI Sequencing Simon Pétren
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Percussions 파코 드 진Paco de Jin
"그저 하나뿐인 그대의/집이 되고 싶은 나"
스트레이트하지만 묘하게 그루비한 8비트 드럼이 절로 몸을 흔들게 한다. 그로서는 10년 만의 미디 작업인 셈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드럼과 베이스는 리얼 연주로 대체되었다. 그는 태풍이 몰아치는 섬에 살면서 태풍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수원의 나무 순이 태풍에 부러지는가 하면, 농기계와 나무들이 날아갈 것 같던 그 순간, 몸을 숨을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은신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고, 그 마음을 표현한 곡이다.
4. 그 가을 숲속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검고 찬 흙/깊고 깊은 곳으로/눈 감은 새 한 마리/날려 보내고 돌아오는 길"
2017년, 루시드폴의 '목소리와 기타' 계보를 잇는 노래. 삼나무 숲속에서 죽은 새를 묻어주고 돌아오던 10월 어느 가을날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곡이다. 그가 만들어낸 특이한 튜닝법으로 조율된 나일론 기타 소리는 가을의 시리고 맑은 숲속 공기를 정말 닮았다. 인공적인 잔향을 배제하고 오직 나무 오두막의 울림에만 기대어 목소리를 실었고, 녹음 당시 오두막 바깥의 여름밤 풀벌레 소리가 BGM처럼 아스라히 담겼다.
5. 바다처럼 그렇게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Voice and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Rhodes and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Percussions 파코 드 진Paco de Jin
"시간은 참 많이도 흘러/난 바다 같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됐고."
찰랑찰랑 차오르는 밀물처럼, 노래가 서서히 고조되면서 아름다운 한편의 서사를 낳고 사라진다. 바닷가에서 자란 그가 한동안 바다를 떠나서 살다가,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해서 다시 바다 가까이로 돌아오게 된 감회를 담은 노래. 어찌 보면 가요의 발라드와는 많이 다른, 루시드폴 식의 ‘발라드’라고도 볼 수 있겠다. 6분여의 노래가 지나고 후주의 기타와 스캣 사운드는 마치 브라질의 싱어송라이터 지자반(Djavan)의 노래를 연상케도 한다.
6. ¿볼레로를 출까요?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Alto and Tenor Saxophones 손성제Sungjae Son
Clarinet 박상욱Sangwook Park
Contra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Percussions 파코 드 진Paco de Jin
"나를 왜 사랑했나요?/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나요?”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싶게끔 만드는 마법 같은 곡이다. 로맨스를 위하여 '쿠반 볼레로'라는 형식을 빌렸다. 클라리넷과 색소폰 트리오가 귓가에서 연주하는 듯하고, 우리는 발맞춰서 춤추기 시작한다. 루시드폴이 만들어낸 최고의 로맨틱한 연가다.
7. 한없이 걷고 싶어라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Contrabass 황호규Hogyu Hwang
Drums 신동진Dongjin Shin
Percussions 파코 드 진Paco de Jin
"비 구름의 눈동자의/한 방울 눈물로/바다가 되는 거라고."
보사노바 시대 이전의 삼바 깐싸웅 (Samba Cancaõ) 혹은 오래된 프렌치 샹송의,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박한 콰르텟 연주가 담담하게 흘러가는 그의 목소리를 잘 받쳐 준다. 유난히 가물었던 2016년 여름을 경험한 그는 지독한 가뭄에 애타는 농부의 마음을 노래에 담아내려고 했다.
8. 부활절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Guitar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Contrabass 황호규Hogyu Hwang
Percussions 파코 드 진Paco de Jin
"우리는,/얼마나/먼 길을 가야 할진 몰라도."
2017년 4월 15일. 부활절 전야에 완성된 곡. 2년 만에 처음으로 노래를 쓴 그날은 세월호가 3년 만에 물밑에서 올라온 날이기도 하다.
9. 밤의 오스티나토 (Bonus track for CD)
Lyrics, Composition, Arrangement 루시드폴Lucid Fall
Piano 조윤성Yoonseung Cho
"슬픔도 없고/아픔도 사라진 것 같은,/순간"
앨범을 구매한 분만 들을 수 있는 보너스 트랙 곡이다. 오두막에서 여름밤에 채집한 소리로 노래는 시작된다. 반딧불이가 숲속을 가득 메웠던 여름밤의 기억이 녹아 있는 곡.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와 목소리의 두 단선율이 고요하게 흘러가고, 11/8박자와 12/8박자가 뒤섞여 노래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배가된다.
III. 티끌이 모여서 우주를 이루듯, 작은 삶들이 완성한 루시드폴의 8집
서두에서는 이번 앨범이 마치 그만의 힘으로 오롯이 채워진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그는 혼자 이 앨범을 만든 게 결코 아니었다.
기꺼이 그를 돕고 감동케 했던 모든 것들이 앨범의 공동제작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 그와 함께 기꺼이 오두막을 지은 동료 목수들, 오두막의 튼튼한 뼈대가 되어준 목재, 귤나무와 배나무, 과수원에 선물처럼 날아든 새, 그의 곁을 지키는 반려견과 아내, 바다와 하늘, 흙 속의 미생물, 맛있는 커피와 빵을 파는 동네 카페의 부부, 온갖 농기계를 수리해주는 철물점 사장님, 해녀 친구,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며 연대하고 살아가는 농부들.
작게만 보이는 하나하나가 모여서 큰 것이 되고, 루시드폴의 8집이 되었고, 나아가 우주가 된다. 이 앨범의 타이틀이 "모든 삶은, 크고 작다."가 아닌, "모든 삶은, 작고 크다."의 순서로 쓰여진 것을 곱씹어 본다. 우리는 작고 (그렇지만 동시에) 큰 존재로, 서로 긴밀하게 의지하고 엮여서 살아간다. 이 앨범에서 느껴지는 선한 연대감을 잊지 말기를. 여러분을 서정적으로, 시적으로 묶어주는 그의 아홉 곡 노래로부터 우리는 마음껏 위로받고, 힘을 얻고 또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이크로 코스모스’. 작지만 큰 우주를 상징하는 말처럼, 루시드폴의 8집은 작고도 크다.
Guest Musicians
이상순 Sangsoon Lee (Electric Guitar for Track 1 안녕,)
이진아 Jinah Lee (Piano for Track 1 안녕,)
Recording Engineer
루시드폴 @ 스튜디오 두두 Lucid Fall @ Studio DooDoo
신재민 @ 필로스플래닛 스튜디오 Jaimin Shin @ Philo's Planet Studio
유형석 @ 리몬 스튜디오 Hyungseok Yoo @ Limon Studio (Assistant: 노희철 Heechoel Roh)
Mixing Engineer
루시드폴 @ 스튜디오 두두 Lucid Fall @ Studio DooDoo
Mastering Engineer
Masato Morisaki @ Saidera Mastering in Tokyo